魯有兀者叔山無趾, 踵見仲尼. (노유올자숙산무지 종견중니)
노나라에(魯) 발 잘린 사람인(兀者) 숙산무지가(叔山無趾) 있었는데(有), 중니를(仲尼) 찾아와 만났다(踵見).
* 踵見(현)仲尼: 踵(종)에 대해서는 異說이 분분하다. 郭象과 成玄英은 ‘踵은 자주라는 뜻[踵頻也]’이라고 풀이했고, 崔譔은 “발가락이 없기 때문에 발뒤꿈치로 걸어간 것이다 [無趾故踵行].”라고 풀이했으며, 林希逸은 따라오다 [繼], 朱桂曜는 이르다 [至], 赤塚忠은 《說文解字》의 ‘踵 追也’에 근거하여 쫓아가다는 뜻으로 보았다. 그러나 《孟子》 〈滕文公 上〉에 ‘踵門而告文公’이라는 구절이 있고, 踵門은 “발이 문에 닿다 [足至門也].”는 뜻(朱熹)으로 ‘자주’라는 의미나 발걸음의 모양과는 전혀 상관없는 뜻이다. 따라서 이 구절 또한 “발걸음이 문 앞에 당도하여 중니를 뵈었다 [踵門而見仲尼].”의 뜻으로 이해하고 “중니를 찾아와 뵈었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仲尼曰: "子不謹, 前既犯患若是矣. 雖今來, 何及矣?"
중니가 말하길(仲尼曰): "그대가(子) 조심하지 않다가(不謹), 전에(前) 이미(既) 죄를 짓고(犯) 재앙을 당한 것이(患) 이와 같구나(若是矣). 비록(雖) 지금 <나에게> 왔지만(今來), 어찌(何) 이를 수 있겠는가(과거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及矣)?"
無趾曰: "吾唯不知務而輕用吾身, 吾是以亡足. 今吾來也, 猶有尊足者存, 吾是以務全之也. 夫天無不覆, 地無不載, 吾以夫子爲天地, 安知夫子之猶若是也!"
무지가 말하길(無趾曰): "내가(吾) 오직(唯) <세상일에, 배움에> 힘쓸 줄 모르고(不知務而) 내 몸을 가볍게 썼고(輕用吾身), 내가(吾) 이 때문에(是以) 발을 잃었습니다(亡足). 지금(今) 내가 온 것은(吾來也), 오히려(猶) 발보다 중요한 것이 있어서이고(有尊足者存), 내가(吾) 이 때문에(是以) 그것을 온전히 하는 일에(全之) 힘쓰고 있습니다(務也). 무릇(夫) 하늘은(天) 덮지 못하는 것이 없고(無不覆), 땅은 싣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地無不載), 내가(吾) 선생님을(以夫子) 천지로 여겼는데(爲天地), 어찌(安) 선생님이(夫子之) 오히려 이와 같을 것을(猶若是) 알았겠는가(知也)!"라고 했다.
孔子曰: "丘則陋矣. 夫子胡不入乎? 請講以所聞!" 無趾出.
공자가 말하길(孔子曰): "나는(丘則) 생각이 짧았다(陋矣). 선생님이(夫子) 어찌(胡) 들어오지 않습니까(不入乎)? 청컨대(請) 들은 것을(以所聞) 이야기해 봅시다(講)!"라고 했다. 무지가 나갔다(無趾出).
孔子曰: "弟子勉之! 夫無趾, 兀者也, 猶務學以復補前行之惡, 而況全德之人乎!"
공자가 말하길(孔子曰): "제자들은(弟子) 힘써라(勉之)! 저(夫) 무지가(無趾), 발 잘린 사람인데도(兀者也), 오히려(猶) 배움에 힘써서(務學以) 이전 행실의 잘못을(前行之惡) 다시 보충하려고 하는데(復補, 而) 하물며(況) 온전한 덕을 가진 사람은(全德之人) 어떻겠는가(乎)!"라고 했다.
* 以復(부)補前行之惡: 補는 결함을 보충한다는 뜻이고 復는 여기서는 ‘다시 부’로 보았으나 復補로 읽는 독법도 可하다.
無趾語老聃曰: "孔丘之於至人, 其未邪! 彼何賓賓以學子爲? 彼且蘄以諔詭幻怪之名聞, 不知至人之以是爲己桎梏邪?"
무지가(無趾) 노담에게 말하길(語老聃曰): "공자가(孔丘之) 지인에 대한 것이라면(於至人), 그 말단인가(其未邪)! 저 사람이(彼) 어찌(何) 자주 찾아와(賓賓以) 선생님을 배우려고 할까요(學子爲)? 저 사람이 또(彼且) 기이하고 속이고 괴상한 것의 이름으로(以諔詭幻怪之名) 명성이 나기를 바라는데(蘄聞), 지인은(至人之) 이것을(以是) 자기의 속박으로 여기는 것을(爲己桎梏) 알지 못하는 것인가(不知邪)?"라고 했다.
* 賓賓: 자주(頻頻)의 뜻(兪樾).
* 彼且蘄以諔詭幻怪之名聞: 諔詭幻怪에 대해서는 이설이 분분하다. 陸德明은 諔詭를 기이한 것[奇異也]이라고 풀이했고, 方勇‧陸永品은 〈제물론〉편의 恢恑憰怪와 같은 의미로 보았는데, 恢恑憰怪는 각각 엄청나게 큰 것, 법도에 어긋난 것, 속임수, 괴이한 것으로 모두 정상에서 벗어난 것들을 의미한다.
* 桎梏(질곡): 「차꼬와 수갑」이란 뜻으로, 즉 속박(束縛)이라는 뜻.
老聃曰: "胡不直使彼以死生爲一條, 以可不可爲一貫者, 解其桎梏, 其可乎?"
노담이 말하길(老聃曰): "어찌(胡不) 다만(直) 그로 하여금(使彼) 삶과 죽음을(以死生) 한 가지로 여기고(爲一條), 옳고 그름을(以可不可) 같게 여겨서(爲一貫者), 그 질곡을 풀도록 하는 것이(解其桎梏), 옳지 않겠는가(其可乎)?"라고 했다.
* 胡不(호불):어찌하여 ~하지 않는가. ‘其可乎’까지 연결되므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의 표현으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無趾曰: "天刑之, 安可解?"(무지왈 천형지 안가해)
무지가 말하길(無趾曰): "하늘이(天) 그에게 형벌을 내렸는데(刑之), 어찌 풀 수 있겠습니까(安可解)?"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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