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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莊子)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 3-4] 노담이 죽자 진일이 조문했다 / 노담사 진일조(老聃死 秦失吊)

by चक्रम् 2024.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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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聃死, 秦失吊之, 三號而出. (노담사 진일조지 삼호이출)

노담이 죽자(老聃死), 진일이 그를 곡하면서(秦失吊之), 세 번 호곡하고 나왔다(三號而出). 

 

* 老聃: 老子. 노자가 누구인지에 관해서는 李耳라는 주장, 老聃이라는 주장, 老萊子라는 주장 등이 있으나, 《장자》에서는 ‘老聃曰’과 ‘老子曰’을 혼용하고 있으므로 여기의 老聃이 곧 老子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弟子曰: “非夫子之友耶?” (비부자지우야)

제자가 말하길(弟子曰): “선생님의 벗이(夫子之友) 아니신지요(耶)?”라고 했다. 

 

曰: “然.” 

<진일이> 말하길(曰): “맞다(然).”라고 했다. 

 

“然則吊焉若此可乎?” 

“그렇다면(然則) 조문하는 것이(吊焉) 이와 같아도 되는지요(若此可乎)?”라고 했다.

 

曰: “然. 始也吾以爲其人也, 而今非也. 向吾入而吊焉, 有老者哭之, 如哭其子; 少者哭之, 如哭其母. 彼其所以會之, 必有不蘄言而言, 不蘄哭而哭者. 

<진일이> 말하길(曰): “된다(然). 처음에(始也) 내가(吾)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以爲其人也, 而) 지금은 아니다(今非也). 좀 전에(向) 내가 들어가서 조문하는데(吾入而吊焉), 늙은 사람이 곡하는데(有老者哭之), 마치 자기 자식인 것처럼 곡하고(如哭其子); 젊은 사람이 곡하는데(少者哭之), 마치 자기 부모인 것처럼 곡한다(如哭其母). 저 사람(노담)이(彼) 그 사람들을 모이게 한 것이(其所以會之), 반드시(必) <위로하는> 말을 바라지 않는다고 했지만(有不蘄言而) 말하게 하고(言), <말로는> 곡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했지만(不蘄哭而) 곡하게 하는 것이 있다(哭者). 

 

* 吾以爲其人也 而今非也: 其人에 대해서는 이설이 분분하다. 林希逸, 福永光司, 池田知久, 安東林 등은 그럴 만한 큰 인물, 곧 훌륭한 사람으로 보았고 곽상은 其人이 노자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 모여서 곡하는 사람들을 지칭한 것으로 보았다. 其人을 老聃으로 볼 경우, “노담이 ‘훌륭한 인물’인 줄 알았지만 지금 보니 아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곽상처럼 其人을 ‘모여든 衆人’으로 볼 경우, 衆人들이 노담을 흠모하여 모여들어 곡하였지만 그 슬퍼함은 속된 인정에 의한 것일 뿐, 노담은 결코 죽음 따위를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에 따라 生死를 초월한 심경에 있었다고 하여 노담을 칭찬하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 必有不蘄(기)言而言 不蘄哭而哭者: 앞의 ‘必有……者’는 ‘彼其所以會之’와 연결되어 ‘저 노담이 사람들을 모이게 한 데에는 반드시 ~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뜻.

 

是遁天倍情, 忘其所受, 古者謂之遁天之刑. 適來, 夫子時也; 適去, 夫子順也. 安時而處順, 哀樂不能入也, 古者謂是帝之縣解.” 指窮於爲薪, 火傳也, 不知其盡也.

이것은(是) 천리를 저버리고(遁天) 인정을 배반하고(倍情), 그 <하늘에서> 받은 것을 잊게 만드는 것이니(忘其所受), 옛날에는(古者) 천리를 저버리는 죄라고 했다(謂之遁天之刑). 마침 올 때가 되어(適來), 부자가 온 시기이고(夫子時也); 마침 갈 때가 되어(適去), 부자가 간 것이다(夫子順也). 태어난 대를 편안히 여기고(安時而) 가는 것을 따르니(處順), 슬픔이나 즐거움이(哀樂) <마음에> 들어갈 수 없고(不能入也), 옛날에는(古者) 이것을 거꾸로 매달렸다 풀려난 것이라고 불렀다(謂是帝之縣解).”라고 했다. 가리키는 것은(指) 땔나무가 다 떨어져도(窮於爲薪), 불은 옮겨가니(火傳也), 그 다함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不知其盡也).

 

* 是遯(遁)天倍情 忘其所受: 遁은 달아나다, 피하다의 뜻. 遯으로 된 본도 있다. 倍는 背叛. 天은 天理(自然의 道). 情은 人情. 忘其所受는 ‘天으로부터 받은 자기 生命의 本質이 무엇인가를 잊어버리는 것’.

* 適來夫子時也 適去夫子順也: 夫子는 모두 노담을 지칭한다. 適來는 때마침 올 때[適來之時], 適去는 때마침 갈 순서[適去之順]. 결국 태어날 때와 죽을 때를 의미한다.

* 帝之縣解: 縣解는 倒懸(거꾸로 매달림)에서 풀려난다는 뜻. 이 구절의 해석은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帝를 上帝, 또는 天으로 보고 “상제, 또는 하늘이 인류에게 내린 거꾸로 매어다는 형벌, 곧 天帝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로 풀이하였다. 그러나 帝자의 字義를 ‘꽃과 꼭지[花蒂 華蔕]의 상형’으로 보는 근거가 있고(宋 鄭樵, 淸 吳大澂), 꽃이 꼭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모양[倒縣]이므로, 이 구절을 ‘꽃이 꼭지에 거꾸로 매달렸다가 떨어지는 것’으로 해석하여 인간의 生死는 마치 초목의 생성‧영락처럼 자연스러운 일임을 비유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 指窮於爲薪 火傳也 不知其盡也: 異說이 분분한 대목이다. 곽상은 指를 손가락으로 보고, 爲薪을 땔나무를 앞으로 밀어낸다[前薪]는 뜻으로 보아 “다 타 버리려고 하는 땔나무라 할지라도 끊임없이 손가락으로 밀어나가면, 불은 새로운 땔나무에 옮겨 붙어서 꺼지는 일이 없다.”라고 풀이하여, 적당한 양생의 도를 터득하기만 하면 사람의 생명도 다하는 일이 없다는 의미로 이해하였다. 이는 郭象과 成玄英 이래의 전통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장자에게 있어서 不滅은 변화의 흐름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지 生滅하는 개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지나친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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