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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莊子)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 3-2] 포정의 신들린 소 해체술과 도의 관계 / 포정해우(庖丁解牛)

by चक्रम् 2024.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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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에 따라 차별이 심하던 시대에, 백정이 임금에게 도(道)를 논한다는 것은 역시나 장자의 우언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아주 심각하면서도 난해한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포정은 소를 잡을 때, 소의 드러난 모습만 보는 것이 아니라 겉모습 너머의 소의 내면까지 본다. 소의 내면을 보는 것을 소에 대한 해부학적 지식이라고 본다면 이것은 고급 기술 정도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포정이 말하는 내면은 소를 ‘신(神)’으로 보는 것이고, 소를 잡을 때는 기술이 아니라 도를 좋아한다고 했다. 도대체 기술 이상의 도는 무엇인가?

 

庖丁爲文惠君解牛. 手之所觸, 肩之所倚, 足之所履, 膝之所踦, 砉然嚮然, 奏刀騞然, 莫不中音. 合於桑林之舞, 乃中經首之會. (포정위문혜군해우 수지소촉 견지소의 족지소리 슬지소기 획연향연 주도획연 막불중음 합어상림지무 내중경수지회)

포정이(庖丁) 문혜군을 위해(爲文惠君) 소를 잡았다(解牛). 손을(手之) <쇠뿔에> 대고(所觸), 어깨를(肩之) <소에> 기대고(所倚), 발을 밟고서(足之所履), 무릎을 세우고(膝之所踦), 휙휙 하면서 뼈 바르는 소리가(砉然) 울리고(嚮然), 칼을 움직이면서(奏刀) 쐐쐐 소리가 나는데(騞然), 어느 것도(莫) 음률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不中音). 상림에 음악에 맞아서(合於桑林之舞), 이에(乃) 경수의 박자에 맞았다(中經首之會).

 

* 庖丁(포정), 白丁(백정)

* 手之所觸: 맨 처음에 손으로 쇠뿔을 잡고 소를 제압하는 동작을 나타낸다. 所에 대해서 赤塚忠은 ‘만일~한다면’의 뜻으로 보았는데, 《論語》 〈雍也〉편에도 “내가 만일 잘못을 저질렀다면 하늘이 버릴 것이다[予所否者 天厭之].”에서 所가 같은 용법으로 쓰인 용례가 있으므로 따를 만하다. 이 견해를 따르면 이하의 문장은 ‘손으로 쇠뿔을 잡고, 어깨를 소에 기대고, 발로 소를 밟고, 무릎을 세워 소를 누르면’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 砉(획)然嚮然: ‘획획’ 하는 소리가 울림. 砉然은 소의 가죽과 뼈가 서로 떨어져 나가는 소리(司馬彪)를 나타낸 의성어. 嚮然은 울리는 소리.

*奏刀騞(획)然: 칼을 움직여 나가면 쐐쐐 소리가 남. 奏는 움직여 나간다는 뜻인데 칼을 쓰는 움직임이 마치 음악을 연주하는 것처럼 리드미컬하다는 뜻에서 節奏의 奏를 쓴 것이다. 騞은 앞의 砉과 같은 발음이지만 砉보다 더 큰 소리(崔譔)를 나타내는 의성어이다.

* 合於桑林之舞: 상림의 무악은 殷나라 湯王의 음악(司馬彪).

* 中經首之會: 中은 앞의 合과 같이 꼭 맞는다는 뜻. 經首는 咸池樂의 樂章 이름(向秀, 司馬彪)이고 咸池는 黃帝가 만들고 뒤에 堯임금이 增修하여 上帝에게 기우제를 지낼 때 연주한 音樂으로 전해진다(池田知久). 會는 음악의 節奏, 곧 박자다.

 

文惠君曰: “譆, 善哉! 技蓋至此乎?” (희선재 기개지차호)

문혜군이 말하길(文惠君曰): “아(譆), 훌륭하구나(善哉)! 기예가(技) 어찌(蓋) 저런 경지에 이르렀는가(至此乎)?”라고 했다.

 

庖丁釋刀對曰: “臣之所好者道也, 進乎技矣. 始臣之解牛之時, 所見无非全牛者. 三年之後, 未嘗見全牛也. 方今之時, 臣以神遇而不以目視, 官知止而神欲行. 依乎天理, 批大卻, 導大窾因其固然. 技經肯綮之未嘗微礙, 而況大軱乎!

포정이 칼을 내려놓고(庖丁釋刀) 대답하여 말하길(對曰): “신이(臣之) 좋아하는 것은(所好者) 도이고(道也), 기예보다 나아간 것입니다(進乎技矣). 처음에(始) 신이 소를 잡을 때는(臣之解牛之時), 보는 것이(所見) 온전한 소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无非全牛者). 삼 년이 지나(三年之後), 일찍이 온전한 소를 보지 못했습니다(未嘗見全牛也). 방금은(方今之時), 신이(臣) 신으로(以神) <소를> 만났고(遇而) 눈으로(以目) 본 것이 아니며(視), 감각기관과 지각이 멈추고(官知止而) 신묘함이 하려고 한 것입니다(神欲行). 천리에 의지하여(依乎天理), 커다란 틈을 치고(批大卻), 커다란 공간으로 <칼을> 이끌어(導大窾) 본래 그러한 것을 따랐습니다(其固然). 경락과(技經) 힘줄이(肯綮之) 작은 장애물도 되지 않았으니(未嘗微礙, 而) 하물며(況) 큰 뼈라면 어떻겠습니까(大軱乎)!

 

* 所見無非〈全〉牛者: 처음에는 소가 하나의 완전한 물체로 보였기 때문에 칼날이 지나가야 할 틈, 곧 자연의 결[道]이 보이지 않고 완전한 소만 보였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디서부터 칼을 대야 할지 몰랐다는 의미이며 全자는 소가 뼈와 살, 근골 따위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적인 물체로 보였음을 나타낸 것이다.

* 三年之後 未嘗見全牛也: 소가 하나의 연속적인 물체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근골과 뼈, 살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칼날이 지나갈 틈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 批大郤(극): 批는 擊으로 치다는 뜻(陸德明). 郤은 隙의 假借字로 筋骨이 연결된 부위의 틈새를 의미한다(方勇‧陸永品).

 

良庖歲更刀, 割也; 族庖月更刀, 折也; 今臣之刀十九年矣, 所解數千牛矣, 而刀刃若新發於硎. 彼節者有閒, 而刀刃者無厚. 以無厚入有閒, 恢恢乎其於遊刃必有餘地矣. 是以十九年而刀刃若新發於硎.

솜씨 좋은 포정은(良庖) 1년 만에(歲) 칼을 바꾸어(更刀), <살코기를> 베어내고(割)也; 보통 포정은(族庖) 한 달에 한 번(月) 칼을 바꾸고(更刀), <뼈를> 부수고(折也); 지금(今) 신의 칼이(臣之刀) 19년 됐는데(十九年矣), 잡은 소가(所解) 수천 마리지만(數千牛矣, 而) 칼날이(刀刃) 마치(若) 숫돌에서(於硎) 방금 꺼낸 듯합니다(新發). 저 뼈에(彼節者) 틈이 있고(有閒, 而) 칼날은(刀刃者) 두터움이 없습니다(無厚). 두터움이 없는 것으로(以無厚) 틈이 있는 곳에 들어가니(入有閒), 넓고 넓어서(恢恢乎) 그 칼날을 놀리는 것에(其於遊刃) 반드시 남는 공간이 있습니다(必有餘地矣). 이 때문에(是以) 19년이 지났지만(十九年而) 칼날이(刀刃) 숫돌에서 방금 꺼낸 듯합니다(若新發於硎).

 

* 族庖: 보통의 백정. 族은 衆과 같다.

* 若新發於硎(형): 發은 撥의 假借字로 꺼내오다는 뜻. 宣穎은 發을 磨로 풀이하여 숫돌에서 갈다는 뜻으로 보았지만 音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다소 무리하다. 朱桂曜나 王叔岷 등은 硎을 型으로 보고 칼틀에서 칼을 새로 만든 것 같다는 뜻으로 보았지만 여기서는 포정의 칼날이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에 硎을 본래 글자 그대로 풀이하는 것이 옳다.

* 恢恢(회회): 넓고 큰 모양(模樣), 여유(餘裕)가 있는 모양(模樣).

 

雖然, 每至於族, 吾見其難爲, 怵然爲戒, 視爲止, 行爲遲. 動刀甚微, 謋然已解, 如士委地. 提刀而立, 爲之四顧, 爲之躊躇滿志, 善刀而藏之.”

비록 그렇지만(雖然), 매번(每) <뼈와 근육이> 얽힌 곳에 이를 때마다(至於族), 나는 그 하기 어려운 것을 보고(吾見其難爲), 두려워하여(怵然) 경계하고(爲戒), 시선을 집중하고(視爲止), 행동을 더디게 합니다(行爲遲). 칼을 움직이는 것이(動刀) 매우 미세하여(甚微), 재빠르게(謋然) 해체되고 나면(已解), 마치(如) 흙이 땅에 있는 것처럼 됩니다(士委地). 칼을 붙잡고( 提刀而) 서서(立), 사방을 둘러보고 머뭇대다가(爲之四顧), <스스로> 만족해지면(爲之躊躇滿志), 칼을 잘 닦아서(善刀而) 보관합니다(藏之).”라고 했다.

 

* 每至於族: 매양 뼈와 근육이 얽히고설킨 곳에 이를 때마다. 族은 ‘뼈와 근육이 얽히고설켜 있는 곳’으로 《周易》 〈同人〉卦의 ‘類族辨物(族을 분류하여 사물을 분별함)’의 族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

* 躊躇滿志(위지만지): 무슨 일을 끝마치고 스스로 만족(滿足)해함을 형용(形容)하는 말.

 

文惠君曰: “善哉! 吾聞庖丁之言, 得養生焉.” (선재 오문포정지언 득양생언)

문혜군이 말하길(文惠君曰): “훌륭하도다(善哉)! 내가(吾) 포정의 말을 듣고(聞庖丁之言), 양생<의 도>를 얻었다(得養生焉).”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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