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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老子) 왕필주(王弼註)

[노자(老子) 왕필주(王弼註) 1]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 가도지도 비상도(可道之道 非其常)

by चक्रम् 2024.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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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필은 무를 상대적인 무와 절대적인 무로 나눠서 보고 있다. 상대적인 무는 상대적인 도이고 사물을 드러나게 하고 효용이 있게 하는 이면이다. 절대적인 무는 절대적인 도이고 몰아일체의 도다. 몰아일체의 도는 분별하려는 지(知)와 하고자 하는 욕(欲)을 제거할 때 도달할 수 있는 무위자연의 경지다.

 

1.1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도를(道) 말로 표현할 수 있으면(可道), 영원한 도가 아니다(非常道). 이름을(名) 이름으로 규정할 수 있으면(可名),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非常名).

 

《淮南子》에서 수레바퀴를 깎는 匠人인 윤편은 齊 桓公에게 聖人이 남긴 글[書]은 결국 실질적인 의미[實]는 사라지고 껍데기[糟粕]만 남은 것이고, 道는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다고 하면서 이 구절을 인용한다. 《장자》와 《회남자》의 해석은 《老子》의 이 첫 구절이 道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方法知(the knowing-how)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河上公의 경우에도 道는 문자로 전달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초기의 주석이다. 그러나 王弼에 이르면 言(말 혹은 문자)이 意(뜻)를 온전히 전달할 수 없다는 주장은 지속되지만, 《周易》의 象을 통해 言이 긍정되고, 다시 言을 통해 意가 긍정되어 결국은 言을 통해 意를 얻을 수 있다는 논의로 전환된다. 그래서 王弼은 象보다 言을 중시하는 義理易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可道之道, 可名之名, 指事造形, 非其常也. 故不可道, 不可名也.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와(可道之道), 이름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름은(可名之名), 지사와 조형이니(指事造形), 영원한 것이 아니다(非其常也). 그러므로(故) 말로 <표현>할 수 없고(不可道), 이름 지을 수 없다(不可名也). 

 

* 指事造形: ‘指事’란 글자를 통해 표현된 구체적인 사물이나 사태를 가리킨다. 樓宇烈에 따르면, ‘指事’는 許愼의 《說文解字》 〈六書篇〉에서 漢字를 分類하는 데서 온 말이다. 指事字의 대표로는 ‘上’이나 ‘下’와 같은 한자가 있다. ‘造形’은 《周易》 〈繫辭傳 上〉 韓康白의 注에서 ‘象’은 ‘日月星辰’에 해당하고 ‘形’은 ‘山川草木’에 해당한다고 했다. 따라서 ‘指事造形’은 눈으로 식별 가능한 형상을 지닌 구체적 사물을 가리킨다. 여기의 대구를 따른다면 ‘道’는 ‘事’, ‘名’은 ‘形’에 상응한다.

 

1.2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무명은(無名) 천지의 시작이고(天地之始), 유명은(有名) 만물의 어머니다(萬物之母). 

 

凡有皆始於無, 故'未形'·'無名'之時則爲萬物之始, 及其'有形'·'有名'之時, 則長之育之, 亨之毒之, 爲其母也. 言道以無形無名始成萬物, 以始以成而不知其所以玄之又玄也. 
무릇(凡) 있음은(有) 모두(皆) 없음에서 시작되고(始於無), 그러므로(故) '형체 없고(未形)'·'이름 없는(無名'之) 때가(時則) 만물의 시작이 되고(爲萬物之始), 그(其) '형체 있고(有形)'·'이름 있는(有名'之) 때에 이르러서는(及時, 則) 자라게 하고(長之) 길러주고(育之), 형통하게 하고(亨之) 성장하게 하니(毒之), 그 어머니가 된다(爲其母也). 도가(道) 형체 없는 것과 이름 없는 것에서(以無形無名) 시작하여(始) 만물을 이루지만(成萬物), 시작되고(以始) 이루어지면서도(以成而) 그 까닭을 알지 못해서(不知其所以) 신비하고(玄之) 또(又) 신비하다는(玄) 말이다(也). 

 

* 凡有 皆始於無: 無名의 세계에서 有名의 세계가 출현한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有生於無’는 세계의 창조라는 의미가 아니라 무형의 세계에서 유형의 세계가 출현하는 것이다. 王弼은 이를 ‘未形無名之時’의 始에서 ‘有形有名之時’로의 변화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 전통에서 말하는 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nihilo)와는 다르다.

 

1.3 故常無欲, 以觀其妙; (고상무욕 이관기묘)

그러므로(故) 늘(常) 욕심이 없어서(無欲, 以) 그 신묘함을 보고(觀其妙); 

 

* 故常無欲: 注34.2에서 “天下 사람들이 늘 욕심이 없을 때에는 만물이 각각 제자리를 얻으나 도가 만물에 베푸는 게 없었다.[天下常無欲之時 萬物各得其所 而道無施於物]”라고 하였으니, 왕필이 말하는 無欲의 상태는 개개인의 욕망 절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능력에 맞는 신분과 직무를 얻어 사회 전체가 조화와 질서를 이룬 상태를 가리킨다. 마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음악가가 되면 조각가가 되려는 욕심을 내지 않는 것과 같다.

 

妙者, 微之極也. 萬物始於微而後成, 始於無而後生. 故常無欲空虛, 可以觀其始物之妙. 

묘는(妙者), 작은 것의 극치다(微之極也). 만물이(萬物) 작은 것에서 시작하고(始於微) 나서 이루어지고(而後成), 무에서 시작하고(始於無) 나서(而後) 생겨난다(生). 그러므로(故) 늘(常) 욕심이 없고(無欲) 텅 비면(空虛), 그 시작하는 만물의 신묘함을(其始物之妙) 볼 수 있다(可以觀)

 

* 萬物……始於無而後生: 王弼은 문자 그대로의 ‘有生於無’를 지지하지 않고 오히려 ‘始於微而後成’으로 이해한다. 달리 말해 만물이 無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微에서 시작된다는 것으로도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결국 存在論的인 無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1.4 常有欲, 以觀其徼. (상유욕 이관기요)

늘(常) 욕심이 있으면(有欲, 以) 그 돌아가 끝나는 곳을 본다(觀其徼). 

 

徼, 歸終也. 凡有之爲利, 必以無爲用. 欲之所本, 適道而後濟. 故常有欲, 可以觀其終物之徼也. 

요는(徼), 돌아가 끝나는 곳이다(歸終也). 무릇(凡) 있음이(有之) 이익이 되려면(爲利), 반드시(必) 없음으로(以無) 쓰임이 되어야 한다(爲用). 욕심의(欲之) 뿌리가 되는 것은(所本), 도에 나아가고(適道) 나서야 가지런해진다(而後濟). 그러므로(故) 늘 욕심이 있으면(常有欲), 그 만물을 끝내는 곳을(其終物之徼) 볼 수 있다(可以觀也). 

 

1.5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차양자동출이이명 동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

이 두 가지는(此兩者) 함께 나왔는데(同出而) 이름이 다르고(異名), 함께(同) 신비하다고 말하니(謂之玄), 신비하고(玄之) 또 신비한 것이(又玄), 온갖 신묘함의(衆妙之) 문이다(門). 

 

兩者, 始與母也. 同出者, 同出於玄也. 異名, 所施不可同也. 在首則謂之始, 在終則謂之母. 

둘은(兩者), 시작과 어미다(始與母也). 함께 나온 것은(同出者), 함께(同) 신비함에서 나온 것이다(出於玄也). 이름이 다른 것은(異名), 하는 일이(所施)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不可同也). 앞에 있으면(在首則) 시작이라고 하고(謂之始), 뒤에 있으면(在終則) 어미라고 한다(謂之母).

 

玄者, 冥也, 默然無有也. 始母之所出也, 不可得而名, 故不可言, 同名曰玄, 而言謂之玄者, 取於不可得而謂之然也. 

신비함은(玄者), 어두운 것이고(冥也), 잠잠하게(默然) 있음이 없는 것이다(無有也). 시작과 어미가(始母之) 나온 곳은(所出也), 이름 붙일 수 없고(不可得而名), 그러므로(故) 함께 이름 붙여(同名) 신비함이 된다고(曰玄) 말할 수 없고(不可言), 그러나(而) 함께([同]) 아득함이라 한다(謂之玄)고 말한 것은(者),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에서(於不可得而謂之然) 취한 것이다(也). 

 

默然(묵연): 입을 다문 채 말없이 잠잠(潛潛)한 꼴.

 

[不可得而]謂之然則不可以定乎一玄, [若定乎一玄]而已, 則是名則失之遠矣. 故曰, 玄之又玄也. 衆妙皆從同而出, 故曰衆妙之門也. 

그렇게 말할 수 없다면([不可得而]謂之然則) 하나의 신비함에(乎一玄) 고정시킬 수 없고(不可以定) 만약(若) 하나의 신비함에 고정시킬 뿐이라면(定乎一玄而已, 則) 이것은 이름이고(是名) 그렇다면(則) 잃은 것이(失之) 멀어진 것이다(遠矣). 그러므로 말하길(故曰), 신비하고(玄之) 또 신비하다(又玄)라고 했다(也). 온갖 신묘함이(衆妙) 모두(皆) 같은 것을 따라서(從同而) 나오고(出), 그러므로(故) 온갖 신묘함의 문이라고 했다(曰衆妙之門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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