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有神巫曰季咸, 知人之生死存亡, 禍福壽夭, 期以歲月旬日, 若神. 鄭人見之, 皆棄而走. 列子見之而心醉, 歸以告壺子, 曰: "始吾以夫子之道為至矣, 則又有至焉者矣."
정나라에(鄭) 신령한 무당이 있어(有神巫) 계함이라고 했는데(曰季咸), 사람의(人之) 생사존망과(生死存亡), 화와 복(禍福) 장수와 요절을 알고(知壽夭), 년월(以歲月) 상순 하순의 날짜까지(旬日) 예언하니(期), 신과 같았다(若神). 정나라 사람들이(鄭人) 그를 보고(見之), 모두(皆) 버리고(棄而) 달아났다(走). 열자가(列子) 그를 만나고(見之而) 마음으로 취해서(心醉), 돌아와(歸以) 호자에고 이르며 말하길(告壺子, 曰): "처음에(始) 제가(吾) 부자의 도를(以夫子之道) 최고라고 여겼는데(為至矣), 지금 보니(則) 또(又) 선생님보다(焉) 지극한 데 이른 사람이 있습니다(有至者矣)."라고 했다.
* 始吾以夫子之道爲至矣 則又有至焉者矣: 始는 처음에, 지금까지의 뜻. 則은 이제 와서 보니의 뜻. 王叔岷은 吳昌瑩이 “則은 今과 같다 [則猶今也].”라고 한 말을 인용하면서, 〈養生主〉편에 ‘始也吾以爲其人也 而今非也’와 비슷한 句法이라고 보았는데 이 견해를 따랐다. 至는 '지극한 데 이르다'의 뜻이고 焉은 於此와 같으며 여기서는 '선생님보다'란 뜻으로 쓰였다.
壺子曰: "吾與汝既其文, 未既其實, 而固得道與?" 眾雌而無雄, 而又奚卵焉! 而以道與世亢必信, 夫故使人得而相女. 嘗試與來, 以予示之."
호자가 말하길(壺子曰): "나는(吾) 너에게(汝) 이미 그 문(형식)을(既其文) 주었지만(與), 아직 그 실질을 주지 않았는데(未既其實, 而) 진실로(固) 도를 얻었는가(得道與)?"라고 했다.
여러 수컷이 있더라도(眾雌而) 암컷이 없는데(無雄, 而) 또(又) 어찌(奚) 알이 있겠는가(卵焉)! 너는(而) 도로(以道) 세상과 싸워서(與世亢) 반드시(必) 믿음을 얻으려 했는데(信), 그러므로(夫故) 사람들로 하여금(使人) 너의 상을 볼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得而相女). 한 번 오도록 해서(嘗與來), 나로(以予) 그에게 보여보도록 해라(試示之)."라고 했다.
* 旣其文 未旣其實: 文과 實은 상대되는 의미로 文은 외형, 형식, 허상, 껍질 등의 의미라면, 實은 내면, 내용, 실상, 알맹이 등의 의미이다. 旣는 통상 이미라는 뜻의 부사로 아직~하지 않는다는 未와 상대되는 의미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未旣의 경우에서 보듯 다한다는 의미의 술어동사로 쓰였다. 곧 旣는 다 전해주었다는 뜻이고 未旣는 아직 다 전해주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 而以道與世亢 必信夫: 而는 2인칭. 成玄英은 而를 너[汝]라고 풀이했다. 한편 池田知久는 而를 접속사로 보고 그런데도의 뜻으로 보았지만 바로 앞문장이 ‘衆雌而無雄而又奚卵焉’으로 而가 접속사로 두 차례 나오는데 다시 같은 종류의 접속사가 연결되는 구조는 구문상 어색하다. 또 ‘又奚卵焉’에서 내용이 일단락되기 때문에 焉을 종결사로 처리하고 而를 새로 시작하는 문장의 주어로 파악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여기의 道는 사람들의 信을 얻기 위한 도구, 수단을 의미하므로 참된 도가 아니라 도의 껍데기를 뜻한다. 겉(껍데기)만의 道를 의미하고, 亢은 對抗하다, 겨루다는 뜻, 必信夫는 郭象이 “세상 사람들에게서 믿음을 얻으려 한다[必信於世].”는 뜻으로 풀이한 것을 따랐다.
明日, 列子與之見壺子. 出而謂列子曰: "嘻! 子之先生死矣, 弗活矣, 不以旬數矣! 吾見怪焉, 見溼灰焉."
다음날(明日), 열자가(列子) 그(계함)와 함께(與之) 호자를 만났다(見壺子).
나와서(出而) 열자에게 말하길(謂列子曰): "아(嘻)! 그대의 선생이(子之先生) 죽을 것이니(死矣), 살아나지 못할 것이고(弗活矣), 열흘로(以旬)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열흘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不數矣)! 내가(吾) 선생에게서 괴이한 것을 보았는데(見怪焉), 그에게서 젖은 재를 보았다(見溼灰焉)."라고 했다.
列子入, 泣涕沾襟, 以告壺子. 壺子曰: "鄉吾示之以地文, 萌乎不震不正. 是殆見吾杜德機也. 嘗又與來."
열자가 들어가(列子入), 울며(泣涕) 옷섶을 적시고(沾襟), 그것을(以) 호자에게 알렸다(告壺子).
호자가 말하길(壺子曰): "좀전에(鄉) 내가(吾) 그에게 지문을 보여주었는데(示之以地文), 멍하니(萌乎) 움직이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았다(不震不正). 그는(是) 아마도(殆) 내 생기가 막힌 것을(吾杜德機) 보았을 것이다(見也). 시험삼아(嘗) 또(又) 데려와라(與來)."라고 했다.
* 萌乎不震不正(止): 萌乎는 멍한 모습으로 〈齊物論〉 편에 나오는 ‘芒乎’와 같다. 震은 動으로 《周易》 〈說卦傳〉에서 震卦를 動으로 풀이한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따라서 不震不止는 움직이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 是殆見吾杜德機也: 是는 季咸을 지칭하는 대명사. 殆는 추측을 나타내는 부사로 아마도, 틀림없이의 뜻. 杜는 막(히)다의 뜻. 成玄英은 塞으로 풀이했다. 德은 生과 같은 뜻으로 쓰였는데, 《周易》 〈繫辭傳 下〉의 “천지의 대덕을 생이라 한다[天地之大德曰生].”고 한 맥락과 유사하다. 機를 幾로 보고 조짐이나 전조의 뜻으로 보는 견해가 많지만, 장자에 나오는 機자는 모두 기계적인 의미의 메카니즘에 가까운 의미로 쓰였기 때문에 부적절하다. 成玄英은 機를 움직임[動]으로 풀이했고, 林希逸은 德機를 生意라고 풀이했다.
明日, 又與之見壺子. 出而謂列子曰: "幸矣! 子之先生遇我也. 有瘳矣, 全然有生矣. 吾見其杜權矣."
다음날(明日), 또(又) 그와 함께(與之) 호자를 만났다(見壺子).
나와서(出而) 열자에게 말하길(謂列子曰): "다행입니다(幸矣)! 그대의 선생이(子之先生) 나를 만났습니다(遇我也). 좋아진 것이 있어(有瘳矣), 완전히(全然) 살아남이 있습니다(有生矣). 나는(吾) <어제> 그에게서(其) 권이 막혀버린 것을(杜權) 보았습니다(見矣)."라고 했다.
列子入, 以告壺子. 壺子曰: "鄉吾示之以天壤, 名實不入, 而機發於踵. 是殆見吾善者機也. 嘗又與來."
열자가 들어가서(列子入, 以) 호자에게 알렸다(告壺子).
호자가 말하길(壺子曰): "아까(鄉) 내가(吾) 그에게 하늘을 보여주었다(示之以天壤), 이름과 실제가(名實) 들어갈 수 없는데(不入, 而) 생기가(機) 발뒤꿈치에서 나왔다(發於踵). 그는 아마(是殆) 내 생기를 보았을 것이다(見吾善者機也). 시험 삼아(嘗) 또(又) 데려와라(與來)."라고 했다.
* 殆見吾善者機也: 善은 生, 곧 앞의 덕과 같다. 宣穎은 善을 生意로 풀이했는데, 林希逸이 德機를 生意로 풀이한 것과 같다. 善者機也의 구문에 대해서는 아직 定說이 없다.
明日, 又與之見壺子. 出而謂列子曰: "子之先生不齊, 吾無得而相焉. 試齊, 且復相之."
다음날(明日), 또(又) 그와 함께(與之) 호자를 만났다(見壺子).
나와서(出而) 열자에게 말하길(謂列子曰): "그대의 선생이(子之先生) <상이> 일정하지 않으니(不齊), 내가(吾) 상을 볼 수 없다(無得而相焉). 안정된다면(試齊), 또(且) 다시(復) 상을 볼 것이다(相之)."라고 했다.
列子入, 以告壺子. 壺子曰: "吾鄉示之以太沖莫勝. 是殆見吾衡氣機也. 鯢桓之審為淵, 止水之審為淵, 流水之審為淵. 淵有九名, 此處三焉. 嘗又與來."
열자가 들어가서(列子入, 以) 호자에게 알렸다(告壺子).
호자가 말하길(壺子曰): "나는(吾) 아까(鄉) 그에게 태충막승을 보여주었다(示之以太沖莫勝). 그는 아마(是殆) 내 기가 평형을 이룬 것을(吾衡氣機) 보았을 것이다(見也). 큰 물고기가 돌아(鯢桓之審) 연못이 되고(為淵), 멈춘 물이 깊은 곳이(止水之審) 연못이 되고(為淵), 흐르는 물이 깊은 곳이(流水之審) 연못이 된다(為淵). 연못에는(淵) 아홉 종류가 있는데(有九名), 이것은(此) 세 가지다(處三焉). 시험 삼아(嘗) 또(又) 데려와라(與來)."라고 했다.
* 太沖莫勝(짐): 兪樾에 의거 《列子》 〈黃帝〉편에 ‘太沖莫朕’으로 되어 있는 것을 따라 勝을 朕으로 본다. 章炳麟, 王叔岷, 赤塚忠, 池田知久 등도 모두 같은 견해다. 陳鼓應은 “太沖은 곧 太虛이고, 莫勝은 곧 無朕이니 太沖莫勝은 太虛하여 아무런 조짐이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라고 풀이했다.
* 鯢(예)桓之審爲淵: 盤桓과 盤旋은 같은 뜻이므로 鯢는 고래이고 桓은 盤桓으로 이리저리 오가는 모습으로 풀이한 簡文帝의 견해가 옳다. 成玄英 역시 “鯢는 큰 물고기이다. 桓은 도는 것이다[鯢大魚也 桓盤也].”라고 풀이했다. 審은 깊다[深]는 뜻(奚侗, 李勉).
明日, 又與之見壺子. 立未定, 自失而走. 壺子曰: "追之! 」列子追之不及, 反以報壺子,
다음날(明日), 또(又) 그와 함께(與之) 호자를 만났다(見壺子). 선 채로(立) 자리를 잡지 못하고(未定), 자신을 잃고(얼이 빠져)(自失而) 달아났다(走).
호자가 말하길(壺子曰): "쫓아가라(追之)!" 열자가(列子) 쫓아가서(追之) 미치지 못하고(不及), 돌아와(反以) 호자에게 보고하니(報壺子),
曰: "已滅矣, 已失矣, 吾弗及也."
말하길(曰): "이미(已) 사라지고(滅矣), 이미 놓쳐서(已失矣), 내가(吾)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弗及也)."라고 했다.
壺子曰: "鄉吾示之以未始出吾宗. 吾與之虛而委蛇, 不知其誰何, 因以為弟靡, 因以為波流, 故逃也."
호자가 말하길(壺子曰): "아까(鄉) 내가(吾) 그에게 나의 근본에서 나서지 않은 것을 보여주었다(示之以未始出吾宗). 내가(吾) 그와 함께(與之) 마음을 비우고(虛而) 욕심이 없는 모습으로 대했더니(委蛇), 그는(其) <내가> 누구인지(誰何) 알 수 없었고(不知), 이에(因) 무언가 무너져 내린다고 생각하고(以為弟靡), 이에(因) 출렁이는 물결이라 생각하고(以為波流), 그러므로 도망갔다(故逃也)."라고 했다.
* 與之虛而委蛇(이): 與之의 之는 계함을 지칭하는 대명사이고 虛는 마음을 비운다는 뜻으로 陳鼓應은 陳啓天의 말을 인용하여 “집착하는 바가 없고 의도를 드러냄도 없다[無所執着 無所表示].”로 풀이했다. 委蛇는 욕심이 전혀 없는 모습이다.
然後列子自以為未始學而歸, 三年不出. 為其妻爨, 食豕如食人. 於事無與親, 彫琢復朴, 塊然獨以其形立. 紛而封哉, 一以是終.
그 뒤(然後) 열자는(列子) 스스로(自) 배움을 시작한 것이 없다고 여기고(以為未始學而) 돌아가(歸), 삼 년 동안 나오지 않았다(三年不出). 그 아내를 위해(為其妻) 밥을 짓고(爨), 사람을 먹이는 것처럼(如食人) 돼지를 먹였다(食豕). 일에(於事) 친소를 따지는 것이 없고(無與親), 깎고 쪼아서(彫琢) 질박함으로 돌아가(復朴), 흙덩이처럼(塊然) 홀로(獨) 그 형체로 서 있었다(以其形立). 어지러이(紛而) 섞여서(封哉), 한결같이(一以) 그렇게 세상을 마쳤다(是終).
* 紛而封哉(戎): 紛而는 어지러운 모양(崔譔). 張君房본에는 紛然而로 되어 있고(陳景元), 《列子》 〈黃帝〉편에는 㤋然而로 되어 있다. 封戎은 어지럽게 뒤섞여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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