果且有成與虧乎哉? 果且無成與虧乎哉? 有成與虧, 故昭氏之鼓琴也; 無成與虧, 故昭氏之不鼓琴也. (과차유성여휴호재 과차무성여휴호재 유성여휴 고소씨지고슬야 무성여휴 고소씨지불고슬야)
과연 그렇다면(果且) 이루어짐과 부족함이 있는가(有成與虧乎哉)? 과연 그렇다면(果且) 이루어짐과 부족함이 없는가(無成與虧乎哉)? 이루어짐과 부족함이 있고(有成與虧), 그러므로(故) 소씨가(昭氏之) 거문고를 연주했고(鼓琴也); 이루어짐과 부족함이 없고(無成與虧), 그러므로(故) 소씨가(昭氏之)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았다(不鼓琴也).
* 有成與虧 故昭氏之鼓琴也: 성립과 파탄이 있는 것은 昭氏가 거문고를 연주하는 것과 같음. 곧 昭氏가 거문고를 연주하여 한 곡을 이루는 것[成]은 무한한 다른 곡들을 잃게 되는 것[虧]과 같다는 뜻. 여기서 성립은 인간의 愛憎好惡의 妄執이 생긴다는 뜻이고 虧는 道의 破綻을 의미한다. 곧 成은 앞구절의 ‘愛之所以成’과 같고 虧는 ‘道之所以虧’에 해당한다.
* 소문(昭文)은 장자가 살았던 때보다 훨씬 전의 훌륭한 거문고 연주자다. 소리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 예민하게 들을 수 있는 뛰어난 청력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거문고 소리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이 소리는 좋고, 저 소리는 싫고 하는 식의 판단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었다. 물론 좋은 소리만을 선택해서 거문고를 연주했기에 그는 훌륭한 연주자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昭文之鼓琴也, 師曠之枝策也, 惠子之據梧也, 三子之知幾乎皆其盛者也, 故載之末年. 唯其好之也以異於彼, 其好之也欲以明之.
소문이(昭文之) 거문고를 연주한 것(鼓琴也), 사광이(師曠之) 박자를 잘 맞춘 것(枝策也), 혜시가(惠子之) 오동나무에 기대어 <변론한 것>(據梧也), 세 사람의 재주는(三子之知) 거의(幾乎) 모두(皆) 그 극성에 이른 것이고(其盛者也), 그러므로(故) 그것이(之) 후세에(末年) 실려있다(載). 오직(唯) 그들이(其) 그것을 좋아한 것은(好之也) 저것(도의 경지)과 달랐기 때문이고(以異於彼), 그들이(其) 그것을 좋아한 것은(好之也) 그것(도)을 밝히려고 한 것이다(欲以明之).
* 師曠之枝策也: 枝策에 대해서는 기둥[策]을 세워[枝] 연주한다는 뜻(馬敍倫), 지팡이를 세우고 그 지팡이에 기대어 假寐한다는 뜻(郭象), 지팡이를 들고 박자를 맞추었다는 뜻(崔譔), 악기를 치는 물건[策]을 가지고[枝] 연주한다는 뜻(林希逸) 등 諸說이 분분하지만 여기서는 成玄英이 “소문은 거문고를 잘 연주하고, 사광은 음률을 잘 알았으며, 혜시는 명리를 논하기를 좋아했다[昭文善能鼓琴 師曠妙知音律 惠施好談名理].”는 주석을 따랐다.
* 唯其好之也: 그들이 그것을 좋아함. 昭文, 師曠, 惠施가 각각 연주, 조율, 변론을 좋아함을 지칭한다.
彼非所明而明之, 故以堅白之昧終. 而其子又以文之綸終, 終身無成. 若是而可謂成乎, 雖我亦成也; 若是而不可謂成乎, 物與我無成也. 是故滑疑之耀, 聖人之所圖也. 爲是不用而寓諸庸, 此之謂 “以明”.
저것(도)은(彼) 밝힐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非所明而) 밝히려 했고(明之), 그러므로(故) 견백론과 같은 어리석음으로(以堅白之昧) 일생을 마쳤다(終). 그리고(而) 그 자식도(其子) 또한(又) 소문의 기술로(以文之綸) 평생을 보냈는데(終), 죽을 때까지(終身) 이룬 것이 없었다(無成). 이와 같은데(若是而)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可謂成乎), 비록(雖) 나도 도한 이루었고(我亦成也); 이와 같은데(若是而)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다면(不可謂成乎), 사물과 우리에게는(物與我) 이룬 것이 없다(無成也). 이 때문에(是故) 희미한 가운데 밝은 것은(滑疑之耀), 성인이(聖人之) 추구하는 것이다(所圖也). 이 때문에(爲是) <성인은 사사로운 지혜를> 쓰지 않고(不用而) 평범함(자연, 도)에 맡기는데(寓諸庸), 이것을(此之) 밝음을 쓰는 것이라고 말한다(謂 “以明”).
* 견백론(堅白論)이란 단단한 흰돌에 대해 단단하다는 것은 촉감으로 아는 것이고, 희다는 것은 시각으로 아는 것이기 때문에 단단함과 희다는 것을 동시에 인식할 수는 없다는 논리다. 그로부터 단단한 흰 돌에 대해서 같은(同) 성질을 두고 다른(異) 것이라고 부를 수 있고, 다른(異) 성질을 두고 같다(同)고 부를 수 있다는 역설이 생기는데 이를 견백동이(堅白同異)라고 부른다. 비슷한 논쟁으로 백마비마론이 있다.
백마는 빛깔을 가리키는 개념이고 말은 형체를 가리키는 개념이므로 백마는 백마이지 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빛깔을 가리키는 개념과 형체를 가리키는 개념은 엄격히 구분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말에는 백마뿐 아니라 흑마(黑馬), 황마(黃馬) 등도 있지만 백마에는 흑마나 황마는 해당되지 않으므로 백마는 백마이지 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백마와 말이라는 개념 사이에는 광협(廣狹)의 차이가 있어서 일치하지 않으므로, 백마를 말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공손룡은 여러 빛깔의 말에서 빛깔을 빼 버린 것이 말이고, 백마는 그러한 말에다가 흰 빛깔을 더한 것이므로 백마는 백마이지 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곧 말이라는 일반개념과 백마라는 특수개념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공손룡의 백마비마론은 기준과 층위에 따라 개념과 사물의 관계가 엄격히 구분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나타낸 비유적 표현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궤변이 아니라 명분(名分)과 실재(實在)를 혼동해서는 안 되며 그 관계를 바로잡아야 올바른 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는 정치윤리를 설파하기 위해 나타난 표현이다. (두산백과) 하지만 당대에도 그의 비실용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던 모양. 이 백마론은 일개 농부에 의해 깨졌는데... 그 농부는 "그럼 백마가 말이 아니고 뭐요?"라 하자 공손룡은 대꾸를 못했다고 한다.
* 其子又以文之綸終 終身無成: 그 자식도 또 昭文의 기술로 그쳐 종신토록 이룸이 없었음. 郭象은 綸을 綸緖로 보아 “昭文의 자식도 소문이 남긴 기술[緖]를 따라 생을 마쳤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다.”는 뜻으로 풀이했고 成玄英도 綸을 緖로 풀이했다.
* 滑(골)疑之耀: 희미한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그윽한 빛. 분명하게 판별하기 어려운[疑] 그윽한[滑] 빛을 말한다. 滑은 어지러이 질서 없는 혼돈을 의미하므로 희미하고 혼돈한 가운데 감춰진 그윽하고 어두운 밝음, 不明之明이다.
* 爲是不用而寓諸庸 : 이 때문에 쓰지 않고 庸에 맡김. 도를 터득한 사람은 자신의 주관적 편견에 따라 사물을 판단하지 않고 자연의 도에 맡긴다는 뜻. 朴世堂은 “庸은 두루 통하여 막히지 않음이니 항구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도이다[庸者 周通不滯 可常之道也].”라고 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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