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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莊子)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 2-6] 상대(相對)의 세계에서 시비(是非)는 불변이 아니다 [조삼모사(朝三莫四)]

by चक्रम् 2023.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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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삼모사(朝三莫四)는 열자에 나오는 고사로 일반적으로 같은 결과인데도 눈앞에 보이는 작은 차이에 그것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하지만 장자에 나오는 맥락을 보자면 '조삼모사'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따라서 '이것이다 저것이다'하는 시비를 가리는 데 몰두하기만 하는 것을 비유했다. 나에게 옳은 것이 누군가에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저공은 원숭이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강요하지 않고 원숭이의 마음을 헤아라고 의견을 수용했다. 결과가 같다면 굳이 자신의 견해를 고집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저공은 천균(天鈞, 하늘의 저울)에 머물러 옳고 그름의 판단을 멈췄다. 이것이 양행(兩行)이다.

 

可乎可, 不可乎不可. 道行之而成, 物謂之而然. 惡乎然? 然於然. 惡乎不然? 不然於不然. 物固有所然, 物固有所可. 無物不然, 無物不可. 故爲是擧莛與楹, 厲與西施, 恢恑憰怪, 道通爲一. 

<사람들은 자기가> 옳은 것을(可乎) 옳다고 하고(可), 옳지 않은 것을(不可乎) 옳지 않다고 한다(不可). 길은(道) 걸어 다녀서 만들어졌고(行之而成), 만물은(物) 그렇게 불러서 <이름이> 그렇다(謂之而然). 왜 그런가(惡乎然)? 그렇다고 하는 것에서 그렇다(然於然). 왜 그렇지 않은가(惡乎不然)? 그렇지 않은 것에서 그렇지 않다(不然於不然). 만물에는 본래(物固) 그러한 것이 있고(有所然), 만물에는 본래(物固) 옳은 것이 있다(有所可). 만물이 그렇지 않은 것이(物不然) 없고(無), 만물이 옳지 않은 것이(物不可) 없다(無). 그러므로(故) 이를 위해서(爲是) 모든(擧) 작은 풀과 기둥(莛與楹), 문둥이와 서시(厲與西施), 광대한 것, 변덕스러운 것, 속이는 것, 괴이한 것이(恢恑憰怪), 도는 통해서(道通) 하나가 되도록 한다(爲一). 

 

* 可乎可 不可乎不可: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 옳고,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한다. 세속의 사람들은 본래 하나인 만물을 可와 不可로 나누어 습관적인 사고와 주관적인 편견에 따라 可와 不可를 판단한다는 뜻이다.

* 道行之而成: 반드시 특정한 곳에 길이 생길 필연적인 이유가 있어서 길이 생기게 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걸어 다니다 보니 길이 생기게 되었다는 말이다. 

* 然於然: 그렇다고 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어서 그렇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과 편견이 그렇다고 하기 때문에 그것을 기준으로 그렇다고 판단한다는 뜻이다.

* 物固有所然 物固有所可: 어떤 사물이든 모두 然과 可의 대상이 될 수 있으므로 습관과 편견을 기준으로 然과 可를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뜻이다. 이 ‘物固有所然’ 이하 아래의 ‘無物不可’까지는 萬物齊同의 입장에서 보는 견해이다. 만물제동의 경지, 다시 말하여 天地가 一指이고 萬物이 一馬인 ‘一’의 세계에서는 可도 없고 不可도 없고 然도 없고 不然도 없으므로, 모든 사물이 然과 可로 肯定될 뿐만 아니라 可와 然을 否定하는 不可와 不然도 無不可 無不然으로 再否定되어 커다란 肯定의 세계로 들어온다는 福永光司의 설명을 참고할 수 있다. 

 

其分也, 成也; 其成也, 毁也. 凡物無成與毁, 復通爲一. 唯達者知通爲一, 爲是不用而寓諸庸. 庸也者, 用也; 用也者, 通也; 通也者, 得也. 適得而幾矣. 因是已. 已而不知其然, 謂之道. 

그 나눔은(其分也), 이룸이고(成也); 그 이룸은(其成也), 없어짐이다(毁也). 모든 사물에서는(凡物) 이룸도 없고 파괴도 없고(無成與毁), 다시 통해서(復通) 하나가 되도록 한다(爲一). 오직(唯) 통달한 사람만이(達者) 통해서 하나가 되는 것을 알고(知通爲一), 이를 위하여(爲是) 쓰지 않고(不用而) 평범함에 맡긴다(寓諸庸). 평범함이란(庸也者), 쓰는 것이고(用也); 쓰는 것은(用也者), 통하는 것이고(通也); 통하는 것은(通也者), 얻는 것이다(得也). 얻음에 이르면(適得而) 그런대로 <도에> 가까워진다(幾矣). 옳은 것을 따를 뿐이다(因是已). 그럴 뿐이고(已而) 그렇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을(不知其然), 도라고 한다(謂之道). 

 

* 爲是不用而寓諸庸: 도를 터득한 사람은 자신의 주관적 편견에 따라 사물을 판단하지 않고 자연의 도에 맡긴다는 뜻. 朴世堂은 “庸은 두루 통하여 막히지 않음이니 항구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도이다[庸者 周通不滯 可常之道也].”라고 풀이했는데 《中庸》의 庸을 平常으로 풀이한 朱熹의 견해를 따른 듯하다.

* 因是已: ‘그러니까(因) 그런 것(是)이다.’로 설명하기도 한다. 다시 풀이하면 ‘있는 그대로를 따를 뿐이다.’라는 의미이다. 인시의 반대 개념은 ‘이것이라고 여기는’ 위시(爲是)이다. 위시는 조삼모사(3+4)에 대해선 화를 내고, 조사모삼(4+3)에 대해선 기뻐했다는 원숭이의 행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원숭이는 서로 다른 제안에 대해서 한쪽은 옳고, 다른 한쪽은 그르다고 판단한 결과이다. 원숭이가 ‘이것이라고 여기는 바’, 또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먹이를 받는 방식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勞神明爲一, 而不知其同也, 謂之朝三. 何謂朝三? 曰狙公賦芧, 曰: "朝三而莫四." 衆狙皆怒. 曰: "然則朝四而莫三." 衆狙皆悅. 名實未虧, 而喜怒爲用, 亦因是也. 是以聖人和之以是非, 而休乎天鈞, 是之謂兩行. 

정신을 수고롭게 하고서(勞神明) 하나가 되려고 하며(爲一, 而) 그 같음을 알지 못하는 것을(不知其同也), 조삼모사라고 한다(謂之朝三). 무엇을(何) 조삼모사라고 하는가(謂朝三)? 저공이 도토리를 줄 때(曰狙公賦芧), 말하길(曰): "아침에 3개를 주고(朝三而) 저녁에 4개를 주겠다(莫四)."라고 했다. 원숭이 무리가(衆狙) 모두 화를 냈다(皆怒). 말하기를(曰): "그렇다면(然則) 아침에 4개를 주고(朝四而) 저녁에 3개를 주겠다(莫三)." 원숭이 무리가 모두 기뻐했다(衆狙皆悅). 이름과 실질이(名實) 달라지지 않았는데(未虧, 而) 기뻐하고 화내는(喜怒) 작용이 있으니(爲用), 또한(亦) <저공이 원숭이가> 옳다고 생각한 것을 따른 것이다(因是也). 이 때문에(是以) 성인은(聖人)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조화시키고(和之以是非, 而) 천균에서 쉬니(休乎天鈞), 이것을(是之) 양행이라고 한다(謂兩行). 

 

* 爲一而不知其同也 謂之朝三: 무리하게 萬物齊同의 ‘一’이 되려고만 하고 그것이 본래 같은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을 朝三이라고 한다. 萬物齊同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그것을 無爲自然이 아닌 人爲的인 행동으로 무리하게 하는 부질없는 행위를 朝三으로 비유하였다.

* 亦因是也 : 또한 눈앞의 이익에 얽매이지 않고 절대의 是, 道를 따라야 함. 곧 원숭이들처럼 어리석지 않으려면 절대의 是를 따라야 한다는 뜻(福永光司)이다. 그러나 郭象과 成玄英을 비롯한 많은 주석가들은 狙公 또한 “원숭이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른 것이다[此亦同其所好 自以爲是].”라고 하여 ‘是’를 절대의 是가 아닌 是非상대의 是로 보았다. 이에 따르면 ‘亦因是也’는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마음이 작용하였으니 이는 또한 상대적 是非의 是를 따랐기 때문이다.”라고 보아야 한다.

* 兩行: 두 가지를 모두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지하여 시비를 나누지 않고 천하의 시비를 따르기 때문에 是와 非가 모두 인정된다는 뜻. 모순과 대립이 동시에 함께 존재함으로써 오히려 모순이 없는 경지를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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